옷에 여권이 생긴다는 것은, 무엇의 끝이고 무엇의 시작인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EU가 모든 섬유 제품에 '디지털 제품 여권'을 붙이기 시작했다. 브랜드에게는 규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패션이 오랫동안 숨겨온 것들을 강제로 꺼내 드는 과정이다. 

올해 7월, EU에서 팔리는 모든 대형 패션 브랜드는 미판매 재고를 소각하거나 폐기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2027~2028년을 기점으로 의류에는 디지털 제품 여권(DPP)이 의무화된다. QR코드나 NFC 태그를 통해 소재 성분, 생산지, 탄소 발자국, 재활용 가능 여부까지 모두 기록하고 공개해야 한다.

표면적으로는 환경 규제다. 그런데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건 단순한 친환경 정책이 아니다. 이 여권이 요구하는 건 패션 기업이 지금껏 한 번도 공식적으로 답하지 않아도 됐던 질문이다. "이 옷은 정확히 어디서, 누가, 무엇으로 만들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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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CO

왜 이 일이 지금 일어났나

패션 산업은 오랫동안 '불투명함'을 비즈니스 모델로 삼아왔다. '원가가 얼마인지, 공장이 어디 있는지, 원단이 어떻게 염색됐는지' 이 정보들은 브랜드의 독점적 자산이었고, 소비자는 라벨에 적힌 나라 이름 하나로 모든 것을 납득해야 했다.

그 구조가 지속 가능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정보 비대칭이 유지됐기 때문이다. 생산지는 여러 단계의 하청으로 숨겨졌고, ESG 보고서는 브랜드가 직접 작성했으며, '지속가능한 소재'라는 표현은 아무도 검증하지 않았다.

DPP는 그 구조에 균열을 낸다. 이제 브랜드는 공급망 3단계, 4단계 하청업체의 정보까지 추적하고 등록해야 한다. 이것이 왜 어려운가 하면, 많은 브랜드들이 그 정보를 자신들도 모르기 때문이다.

"브랜드의 진짜 문제는 규제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처음으로 직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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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CO

이 포인트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나

DPP는 어떤 의미에서는 '신뢰의 인프라'다. 지금까지 패션에서 신뢰는 브랜드의 이미지에 기대어 있었다. 앞으로는 데이터에 기대야 한다. 좋은 이야기를 잘 만드는 것보다, 좋은 데이터를 제대로 관리하는 역량이 브랜드 자산이 되는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작은 브랜드에게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 처음부터 소규모 공급망으로 시작한 창업자는 모든 거래처를 알고 있다. 반면 수천 개의 SKU를 돌리는 대형 브랜드는 그 데이터를 구축하는 데만 수년이 걸릴 수 있다. 투명함이 기술적으로 작은 기업에게 더 쉬운 과제가 되는 역설이 생긴다.

우리는 '지속가능한 패션'을 오랫동안 이야기해왔다. 그런데 그 대화의 대부분은 브랜드가 정의한 언어로 이루어졌다. DPP는 처음으로 소비자와 규제 기관이 그 언어를 직접 검증할 수 있는 도구를 갖게 되는 사건이다.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의 브랜드 혹은 당신이 MD로서 다루는 상품들은, 지금 이 순간 그 여권을 발급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만약 아직 아니라면, 그것은 기술적인 문제인가  아니면 무언가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인가.




Editor 김아루
2026.05.27.